4계절 사랑받는 조선 최고의 정원, 소쇄원
임창균, 임경봉 기자 관광
명소 2022.09.22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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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매일신문과 HNN뉴스는 공동 취재촬영을 위해 가사문학면에 위치한 소쇄원에 방문했다.
사진으로는 미처 표현 못할 소박하고 아담한 매력으로 4계절 내내 관광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소쇄원 뜻>
소쇄원(瀟灑園)이라는 어려운 한자이름이 뜻함은 빗소리 소(瀟), 혹은 물 맑고 깊을 소(瀟)이고 灑는 쇄, 새, 혹은 사라고 읽을 수 있는데 물 뿌릴 쇄(灑)나 깨끗할 쇄(灑)라는 뜻과 음을 갖는다. 소쇄란 중국 남북조시대의 문인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말이다. 결국 굳이 소쇄원의 이름을 풀어쓴다면 “물 맑고, 시원하며 깨끗한 원림”이라 하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덧붙이면 ‘속세를 떠난 느낌이 있다’는 뜻으로도 말할 수 있겠다.
<소쇄원 구조>
소쇄원은 명승40호인 우리나라 대표적인 원림으로,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봉대와 광풍각 그리고 제월당이 있다. 긴 담장이 동쪽에 걸쳐 있고, 북쪽의 산 사면에서 흘러내린 물이 계곡을 이루고 흘러내려와 담장 밑을 통과하여 소쇄원의 중심을 관통한다.
“소쇄원”의 주요한 조경 수목은 대나무와 매화, 소나무, 난, 동백, 오동, 배롱, 산사나무, 측백, 치자, 살구, 산수유, 황매화 등이 있으며, 초본류는 석창포와 창포, 맥문동, 꽃무릇, 국화 등이 있다.
조경물로는 너럭바위, 흘러내리는 폭포, 걸상모양의 탑암과 책상바위 상암, 홈을 판 고목으로 물을 이어가는 두 개의 연못, 상하지가 있다. 뿐만 아니라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애양단, 계곡을 건너지르는 외나무다리 약작, 경사지에 적절히 단을 쌓아 꽃과 나무를 심고 담장으로 내부공간을 아우르고 감싸는 조화로운 곳이다.
<소새원의 역사>
소쇄원의 조화로운 공간 조성은 조선 중종 때의 선비로서 조광조의 제자인 소쇄공 양산보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는 스승이 기묘사화(1519년)로 죽게 되자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고향인창평에 은둔하여 처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정확한 조영 시기는 1520년대에 시작하여 그의 자식과 손자 대에 이르러 완성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건축 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호남의 유학자 김인후가 지은 ‘소쇄원 즉사’는 1528년, 송강 정철의 ‘소쇄원제 초청’에는 소쇄원이 그가 태어난 1536년에 지은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면앙정 송순이 소쇄원을 두고 지은 시가 1534년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1520년대 중후반에 건축을 시작하여, 1530년대 초중반에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양산보는 죽으면서 유언으로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것이며, 후손 어느 한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양산보의 후손들은 그의 유언을 철저하게 지켜서 소쇄원을 지켜왔다.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불에 타기도 했지만 후손들에 의하여 다시 복원, 중수되어 현재까지 15대에 걸쳐 후손들이 잘 가꾸어 나가고 있는 조선 최고의 민간정원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수익이 아닌 유지비 명목으로 성인 기준 2천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사진으로는 미처 표현 못할 소박하고 아담한 매력으로 4계절 내내 관광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소쇄원 뜻>
소쇄원(瀟灑園)이라는 어려운 한자이름이 뜻함은 빗소리 소(瀟), 혹은 물 맑고 깊을 소(瀟)이고 灑는 쇄, 새, 혹은 사라고 읽을 수 있는데 물 뿌릴 쇄(灑)나 깨끗할 쇄(灑)라는 뜻과 음을 갖는다. 소쇄란 중국 남북조시대의 문인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말이다. 결국 굳이 소쇄원의 이름을 풀어쓴다면 “물 맑고, 시원하며 깨끗한 원림”이라 하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덧붙이면 ‘속세를 떠난 느낌이 있다’는 뜻으로도 말할 수 있겠다.
<소쇄원 구조>
소쇄원은 명승40호인 우리나라 대표적인 원림으로,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봉대와 광풍각 그리고 제월당이 있다. 긴 담장이 동쪽에 걸쳐 있고, 북쪽의 산 사면에서 흘러내린 물이 계곡을 이루고 흘러내려와 담장 밑을 통과하여 소쇄원의 중심을 관통한다.
“소쇄원”의 주요한 조경 수목은 대나무와 매화, 소나무, 난, 동백, 오동, 배롱, 산사나무, 측백, 치자, 살구, 산수유, 황매화 등이 있으며, 초본류는 석창포와 창포, 맥문동, 꽃무릇, 국화 등이 있다.
조경물로는 너럭바위, 흘러내리는 폭포, 걸상모양의 탑암과 책상바위 상암, 홈을 판 고목으로 물을 이어가는 두 개의 연못, 상하지가 있다. 뿐만 아니라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애양단, 계곡을 건너지르는 외나무다리 약작, 경사지에 적절히 단을 쌓아 꽃과 나무를 심고 담장으로 내부공간을 아우르고 감싸는 조화로운 곳이다.
<소새원의 역사>
소쇄원의 조화로운 공간 조성은 조선 중종 때의 선비로서 조광조의 제자인 소쇄공 양산보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는 스승이 기묘사화(1519년)로 죽게 되자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고향인창평에 은둔하여 처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정확한 조영 시기는 1520년대에 시작하여 그의 자식과 손자 대에 이르러 완성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건축 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호남의 유학자 김인후가 지은 ‘소쇄원 즉사’는 1528년, 송강 정철의 ‘소쇄원제 초청’에는 소쇄원이 그가 태어난 1536년에 지은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면앙정 송순이 소쇄원을 두고 지은 시가 1534년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1520년대 중후반에 건축을 시작하여, 1530년대 초중반에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양산보는 죽으면서 유언으로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것이며, 후손 어느 한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양산보의 후손들은 그의 유언을 철저하게 지켜서 소쇄원을 지켜왔다.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불에 타기도 했지만 후손들에 의하여 다시 복원, 중수되어 현재까지 15대에 걸쳐 후손들이 잘 가꾸어 나가고 있는 조선 최고의 민간정원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수익이 아닌 유지비 명목으로 성인 기준 2천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 임창균, 임경봉 기자 jyn93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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